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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사람들은 일제가 식민통치기간 중 우리역사를 전부 말살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잘못 와전된 것으로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일제가 어떻게 겨우 35년의 세월 동안 그 방대한 작업을 모두 다 할 수 있었겠는가! 광활한 아시아대륙을 말 달리며 호령했던 우리의 위대하고 찬란했던 대륙지배의 역사가 축소·말살된 실상은 다음과 같다.
 
중국대륙에서는 우리와 동족인 원나라가 남경을 근거지로 해서 일어난 주원장에게 밀려 북쪽 몽골초원으로 쫓겨 가고, 1368년 남경에서는 한족 중심의 명나라가 건국된다. 원나라가 망함으로써 중원을 차지하게 된 명나라로 인해 그전 송나라 때까지만 해도 황하 남쪽에 조그맣게 있던 한족의 영토가 갑자기 큰 풍선처럼 커져버린 것이다.
 
한편 위화도회군으로 권력을 쥔 이성계는 1392년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연다. 그러나 당시 부도덕하게 정권을 잡았기에 대의명분이 없어 많은 대신들과 백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던 이성계는 강력한 외부의 힘인 명나라를 끌어들이고는 스스로 속국임을 자처한다. 국호인 조선까지 명나라에게 하사받게 되고, 소중화가 되어 유교를 국시로 하는 억불숭유정책을 편다.
 
명나라는 3대 영락제 때인 1416년 도읍을 북경으로 옮긴다. 그런데 그 지역은 예로부터 단 한 번도 한족의 영토가 되어본 적이 없는 우리 민족의 땅이었다. 막상 그런 곳에 도읍을 하려하니 주변국 특히 속국인 조선에 위엄도 서지 않고, 통치의 목적으로 명나라는 예로부터 북경이 한족 땅이었다는 역사왜곡을 단행한다. 그 때 지명이동된 것이 고대역사강역을 밝힘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갈석산과 고죽국 백이·숙제의 무덤으로 유명한 노룡현 수양산의 이동이었다. 
 

▲ <대청광여도>에 그려진 갈석산과 고죽국(노룡)은 하북성 동쪽     © 편집부

 

▲ 고죽국 왕자 백이.숙제 무덤의 지명이동     © 편집부

 
  
조선왕조는 이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으며, 오히려 소중화가 되어 스스로 우리 고대사를 축소·왜곡하게 되는 것이다. 당시 명나라와 조선과의 관계를 알 수 있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있다. 태종 때 명나라 사신이 와서 황제의 칙서를 받으라하니 임금이 절하고 나서 서쪽 층계로 올라가 사신 앞에 꿇어앉아 머리를 바닥에 두드리며 말하였다. “어찌 감히 마음을 다해 명령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조선왕조에서 가장 강력한 왕권을 휘두르던 왕이었던 태종도 명나라 사신 앞에서는 마치 고양이 앞에 생쥐 격이었다.

▲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미 고대사서가 감금되었기 때문

 
가장 사대모화가 지극했던 세종 때인 1424년 명나라 영락제가 죽자 세종은 자신과 영락제는 군신관계라 하며 27일간이나 소복을 입고 곡을 하며 죽음을 애도하였고, 정사를 돌보지 않고 위패를 떠나지 않았으며 식음을 전폐하여 건강을 많이 해쳤다는 기록도 있다. 또한 세종 때 <신찬팔도지리지>와 <세종실록 지리지>를 만들면서 중국대륙에 있었던 우리의 역사지명들을 모두 한반도로 옮겨와 심어버린다. 
 
세조 3년(1469)에는 역사·천문·지리·음양을 기록한 모든 고대사서의 수거령이 내려지고, 이어 예종과 성종도 즉위하자마자 같은 수거령을 내리고 숨긴 자는 참형에 처한다는 어명까지 내린다. 수거된 서책 중 상당수는 불태워지고 나머지는 궁궐서고에 감금시켰다. 나중에 일제가 단기간에 우리 역사를 쉽게 말살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조선왕조가 이미 우리 고대사서를 수거해 분서(焚書)·감금(監禁)시킨 역사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유학에 심취된 사대부들은 공자를 최고의 성인으로 받들어 모시고 공자의 나라인 중국을 동경하고 그리워하고 흠모하게 되고, 유교는 조선왕조의 정신세계를 완전하게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역사적으로 같은 핏줄인 북방의 몽고족과 거란족 그리고 여진족의 나라인 금·청나라를 북방오랑캐로 여기게 되었다. 소중화가 된 조선왕조 사대부들의 사대모화주의는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    

중화사대모화주의의 상징, 유명조선(有明朝鮮)

고산 윤선도와 더불어 조선시대 최고의 문장가로 손꼽히는 송강 정철의 묘비명은 이렇게 시작한다. '有明朝鮮 左議政 寅城府院君 諡文靑公 松江 鄭澈之墓’ 그 뜻은 “(유명조선) 좌의정을 역임했고, 인성부원군의 군호를 받았으며, 사후 문청공이라는 시호를 받고 호가 송강인 정철의 무덤”이라는 뜻이다. 이렇듯 16세기 이후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묘비에는 당사자의 관직과 성명 앞에 으레 ‘유명조선(有明朝鮮)’이란 말이 관용구처럼 따라붙는다.
 
그런데 비석의 맨 앞에 붙어있는 ‘유명조선’이라는 글자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여러 의견이 있으나 이는 ‘명나라가 있는 조선’ 즉 ‘명나라 속국 조선’이라는 뜻으로, 종주국 명나라에 대한 조선왕조 사대부들의 사대모화사상의 발로로 해석되어 진다. 혹자는 병자호란 때 조선에게 치욕을 안겨준 오랑캐 청나라에 대한 반발로 해석하기도 하나, 송강 정철의 묘는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에 조성된 것이므로 그러한 해석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조선조정은 임진왜란 때 위기에 처한 조선을 돕겠다던 동족 누루하치의 제안을 오랑캐라는 이유로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명나라에게 원병을 요청한다. 명나라는 참전 이후 국력이 급격히 쇠약해져 이자성의 농민반란으로 1644년 망하게 된다. 이에 앞서 중원을 도모할 욕망을 불태우던 청나라 태종은 1636년 후방의 불안을 먼저 없애고자 조선을 침공해 인조임금에게 삼전도에서 항복을 받고 앞으로 청나라를 형님으로 모실 것을 약속받는다. 물론 소중화였던 조선왕조는 이를 엄청난 치욕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만일 청 태종이 조선과 청나라가 동족이라는 역사의식이 없었다면 아마 인조임금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고, 물론 조선이라는 나라도 없어졌을지도 모른다. 청 태종은 항복만 받고 인질을 데리고 감으로써 후방의 위협을 없앤 다음 중원을 도모할 기회를 노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고, 다음해 아들인 순치제에 이르러 청나라는 산해관을 지키던 명나라 장수 오삼계의 투항으로 북경으로 진군하여 이자성을 몰아내고 결국 중원을 장악하게 된다.
 
이후 청나라는 조선에게 군신관계 즉 속국임을 요구했고, 조선조정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겉으로는 청나라를 상국(上國)으로 섬겼지만, 마음속으로는 청나라를 오랑캐로 여기며 복종하지 않았다. 청나라 지배하에 있으면서도 대내적인 기록을 쓸 때는 “崇禎紀元後 00 甲子 0年" 하며 청나라 연호가 아닌 이미 망해버린 명나라의 연호를 썼다. 얼마나 명나라에 대한 중화사대모화가 지극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삼전도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하는 인조 임금     © 편집부

  
숭명반청주의자인 인조임금은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갔다가 9년 만에 돌아온 장자 소현세자를 독살시키고 며느리 세자빈과 손자들을 모두 죽여 버린다. 소현세자가 오랑캐 청나라에게 우호적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또한 연암 박지원이 <열하일기>를 통해 청나라의 눈부신 발전상을 소개하며 “모든 분야에 그 장점들을 도입하자”고 제안하니 조정대신들은 "어찌 저 개·돼지만도 못한 오랑캐의 습속을 따르겠는가?”고 말했으니 명나라에 대한 사대모화가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알 수 있다 하겠다.
 

▲ 은신군 신도비의 유명조선     © 편집부

죽어서는 묘비에 이미 없어져버린 명나라를 그리워하며 ‘유명조선(有明朝鮮)’이라는 문구를 써서 자신의 마음을 나타내는 동시에 오랑캐 청나라에 대항했던 것이다. 일예로 서울역사박물관에는 정조임금이 직접 쓴 ‘은신군 신도비’가 있는데, 거기에도 '유명조선국' 이라는 문구가 뚜렷하다. 은신군은 정조의 이복동생으로 흥선대원군의 조부가 되는 인물이다. 당시는 청나라 연호를 쓰던 시절임에도 국왕이 직접 쓴 묘비가 이랬던 것으로 보아 그야말로 조선왕조는 죽어서도 뼈 속까지 명나라를 지극정성으로 사모했던 소중화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조선왕조 사대부들의 명나라를 향한 중화사대모화주의는 장장 500년 동안 계속 이어졌던 것이다. 그동안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는 한반도와 만주 일대라는 반도사관이 정착되고, 역년 2,096년 단군조선의 역사는 두 동강이 나고 허구의 천년 기자조선이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조선이라는 국호도 단군조선의 조선이 아니라,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는 그 조선이다.
 
조선 초 삼봉 정도전이 지은 아래 <조선경국전>에 조선이라는 국호가 정해진 이야기가 있다.
“해동은 국호가 일정하지 않았다. 조선이라고 일컬은 이가 셋 있었으니, 단군과 기자와 위만이 바로 그들이다. (중략) 이들(우리 삼국·후삼국)은 모두 한 지역을 몰래 차지하여 중국의 명령을 받지 않고 스스로 국호를 세우고 서로를 침탈하였다. (중략) 그러나 기자만은 주 무왕의 명령을 받아 조선후(朝鮮候)에 봉해졌다.
지금 천자(명 태조)께서 “오직 조선이란 칭호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그 유래가 구원하다. 이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하늘을 받들어 백성을 다스리면, 후손이 길이 창성하리라.”고 명하였는데, 아마 주 무왕이 기자에게 명했던 것처럼 천자께서 전하에게 명한 것이리니, (중략)
기자는 무왕에게 홍범을 설명하고 그 뜻을 부연하여 8조의 가르침을 지어서 나라 안에 실시하니, 정치와 교화가 성하게 행해지고 풍속이 지극히 아름다웠다. 그러므로 조선이란 이름이 천하 후세에 이처럼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제 조선이라는 아름다운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게 되었으니, 기자의 선정 또한 당연히 강구해야 할 것이다. 아! 명나라 천자의 덕도 주 무왕에게 부끄러울게 없거니와, 전하의 덕 또한 어찌 기자에게 부끄러울 게 있겠는가? 장차 홍범의 배움과 8조의 가르침이 금일에 다시 시행되는 것을 보게 되리라” 
 

▲ 국호 조선은 기자조선의 조선이라는 <조선경국전>      © 편집부

  
     (원본 기사)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11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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